HAZEBOUND

안개의 시대

첫 안개로부터 세 해째

아래로 넘기기

당신은 낯선 여관에서 눈을 뜹니다.

─“안개가 걷힌 자리에서 당신을 찾았어요.”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이름과 고향은 기억하고 있지만, 이 여관에 이르기까지의 일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여관 주인은 킹스헤이븐으로 가 보라고 하네요. 안개가 내린 뒤로 길도 마을의 위치도 달라지곤 하지만, 수도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다고요. 길을 잃은 사람도, 누군가를 찾는 사람도 그곳으로 모인답니다.

수도까지는 대략 일주일.

이제는 쓸모없어진 옛 지도에 따르면요.

01

세계의 시작

세계의 시작

처음에는 그저 안개가 낀 날이었다.

강과 숲이 희뿌옇게 가려지고 마을 사이를 잇는 길마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에도, 사람들은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렸다. 날이 개면 멈추었던 일을 마저 하고, 가던 길을 이어 갈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안개가 걷혔을 때, 그들은 걸음을 떼지 못했다.

자리를 옮긴 채 솟아오른 산, 기억에 없는 땅을 가로지르는 강물. 이웃 마을로 가는 길을 따라온 사람조차 낯선 풍경 앞에 지도를 펼쳤다. 지나온 길을 되짚어 보아도 어디서 잘못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지도에는 분명 그 마을의 이름이 있었으니.

사람들은 그날을 ‘첫 안개’라 부른다.

세계의 시작

안개에 휘말렸던 이들 중엔 오랫동안 길을 헤매다 돌아온 사람도 있었고,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지방에서 발견된 사람도 있었다. 끝내 소식이 끊긴 사람도 적지 않았다.

안개가 걷힌 자리에서는 전에 없던 것들이 발견되었다. 누군가는 낯선 폐허를 보았다고 했고, 누군가는 무너진 지붕 아래에서 사람을 닮은 것이 움직였다고 했다. 그것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 자리를 지키던 본래의 것들은 어디로 갔는지 누구도 설명할 수 없었다.

학자들은 각지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를 모으고 징후를 기록했다. 약제사와 점술가를 찾는 발길도 늘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자신이 겪은 일을 이해하려 했으나, 첫 안개로부터 세 해째가 된 지금까지도 그날 무엇이 시작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02

안개의 시대

안개의 시대

사람들은 한동안 옛 지도를 버리지 못했다.

마을의 이름도, 강을 건너는 다리도 지도에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길을 따라 나선 사람들은 낯선 들판에 닿곤 했고, 안개가 몇 번 더 지나간 뒤에는 누구도 지도만 믿고 길을 떠나지 않게 되었다. 여행자들은 대신 그 길을 지나온 이를 찾았다. 여관에 새 손님이 들면 어디에서 왔는지, 어느 길로 왔는지를 묻는 말이 오갔다. 다음 날 떠날 길을 알아보려는 이도 있었고, 소식이 끊긴 마을의 이름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이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안개가 걷힌 자리에 그대로 머물렀다. 돌아갈 길을 찾지 못한 채 낯선 마을에서 일을 구하고, 함께 길을 헤매던 사람들과 이웃이 되었다. 그렇게 살아갈 곳을 얻은 뒤에도 고향 쪽에서 왔다는 여행자가 들면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안개의 시대

길을 나선 사람도 적지 않았다. 잃어버린 가족을 찾으러, 제 고향에 돌아가기 위하여, 혹은 안개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싶어서. 여관에서 들은 소문 하나에 가려던 방향을 바꾸기도 했다. 저마다 다른 사정으로 떠난 사람들은 같은 길에서 만나 얼마간 동행했고, 갈림길에 이르면 서로의 목적지를 물은 뒤 다시 흩어졌다.

03

다섯 지방

수도로 향하는 여행자들은 다섯 지방의 길을 오간다. 강가와 산비탈, 고개와 숲, 습지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저마다의 손기술과 풍습을 이어 왔다. 안개가 지나간 뒤에도 여관들은 예전 이름을 그대로 내걸었고, 여행자는 그 이름을 듣고 앞으로 만날 풍경을 짐작하곤 했다.

다섯 지방하이워터

하이워터의 어부들은 오래전부터 강이 남긴 흔적을 읽으며 살았다. 수위표 여관의 문기둥에는 해마다 물이 차오른 높이가 눈금으로 새겨졌고, 사람들은 그 앞에서 지난해의 강을 이야기했다.

첫 안개가 걷혔을 때, 그들이 평생 읽어 온 강은 다른 곳으로 흐르고 있었다. 문기둥에는 지난 물높이가 남아 있었으나, 달라진 강줄기를 알려면 직접 길을 나서거나 그곳을 다녀온 사람에게 물어야 했다. 물레방아가 있는 밀브룩에는 이제 길과 강의 소식을 묻는 여행자들이 찾아온다.

다섯 지방그레이힐

그레이힐의 양치기들은 산비탈을 따라 양 떼를 몰며 살았다. 잿빛 양 여관은 지붕에 돌을 얹었고, 난로 곁에는 개 한 마리가 몸을 말고 누워 있었다. 근교 마을 울브릿지에서는 깎아 낸 양털을 물들여 내다 팔았다.

안개가 지나간 뒤에도 양털을 진 사람들은 돌다리를 건넜다. 그 곁으로 다음 고개에 이르는 길을 묻는 여행자들이 오갔고, 양을 찾아 비탈을 오르던 양치기들도 처음 보는 갈림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곤 했다. 오래 살아온 산이라고 해서 모든 길을 아는 것은 아니게 되었다.

다섯 지방리버게이트

리버게이트의 마부들은 고개를 넘어 사람과 짐을 날랐다. 빗장 여관 입구 위에는 쇠빗장이 걸려 있었고, 근교 마을 스톤웨이에는 넓은 돌길과 역참이 있었다. 어느 고개에서 말을 쉬게 하고 어디에 닿기 전에 해가 저물지, 오래 일한 마부라면 길을 떠나기 전부터 헤아릴 수 있었다.

첫 안개 뒤에는 그 익숙한 셈이 맞지 않았다. 늘 넘던 고개에 얼마나 걸릴지, 그 너머에 아직 목적지가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마부들은 이제 떠나기 전 역참에서 그 길을 넘어온 사람의 이야기부터 듣는다.

다섯 지방오크홀로우

오크홀로우의 사냥꾼들은 숲에서 먹을 것과 재료를 얻었다. 속 빈 참나무 여관은 커다란 나무 밑동 안에 식당을 들였고, 근교 마을 오크번의 제재소에서는 숲에서 베어 온 나무를 다듬었다.

첫 안개 뒤로 숲의 짐승들이 사나워졌다. 사냥꾼들은 숲에 들기 전 흔적을 살피는 데 더 오래 시간을 들였고, 깊이 들어갈 때면 함께 갈 사람을 구하기도 했다. 여관 식당에서는 어느 비탈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묻는 이야기가 늦도록 이어진다. 내일 자신이 들어갈 숲의 소식일 수도 있었으므로.

다섯 지방솔트마쉬

솔트마쉬 사람들은 습지에서 소금을 얻어 살았다. 갈대 지붕 여관은 말뚝 위에 서 있었고, 바람이 불면 소금 냄새가 실려 왔다. 근교 마을 솔트브룩에는 소금을 말리는 판들이 줄지어 놓여 있다.

처음 이 땅을 밟은 여행자들은 발 디딜 곳을 찾느라 걸음이 더뎠다. 그 곁을 이곳 사람들은 익숙한 걸음으로 지나갔다. 안개가 지나갈 때마다 달라진 길을 다시 살펴야 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습지로 나가 소금을 거두고 돌아왔다.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온 땅이었다.

04

모든 길이 향하는 곳

모든 길이 향하는 곳

킹스헤이븐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항구 도시다.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성채가 있고, 그 아래로 지붕들이 항구까지 이어진다. 시장에서는 물건을 사고팔며, 장인 거리의 공방에서는 저마다 익힌 기술로 일한다. 첫 안개 뒤에도 성벽 안이 온전한 몇 안 되는 큰 도시 가운데 하나다.

킹스헤이븐만은, 안개가 걷힌 뒤에도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돌아갈 곳을 잃은 사람들에게는 찾아갈 곳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누군가를 찾는 사람 역시 킹스헤이븐으로 향한다. 헤어진 사람이 길을 찾고 있다면, 언젠가 그 도시로 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모든 길이 향하는 곳

관문을 지나려면 통행증이 필요하다. 근교 마을의 관리인들은 안개에서 나온 사람에게 통행증을 내주고 수도로 가는 일을 안내한다. 성채 안뜰에서는 서기가 여행자의 이름을 받아 적는다. 한쪽 벽에는 찾는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히 붙어 있다. 자신의 이름을 올리는 것은 누군가에게 살아 있다는 소식을 남기는 일이기도 하다.

지금의 왕국은 세 옛 왕국이 하나로 합쳐 이루어졌다고 전해진다. 들판에 서 있는 세 왕의 돌은 그때의 맹세를 남긴 자리다. 오래된 다리 기둥과 관문의 문기둥, 닳은 돌계단에도 이전 시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사람들이 그 길을 오가던 때에는, 지금과 같은 안개가 없었다.

05

길의 풍습

길의 풍습

여행자는 예배당에서 길을 떠날 축복을 구하고, 돌아온 뒤에는 무사히 다녀왔음을 감사한다. 사람들은 길의 성자를 기린다. 샘가 예배당을 지키는 수사는 안개가 짙어진 날 종을 쳐, 길을 잃은 사람이 소리를 듣고 찾아올 수 있도록 한다.

첫 안개 이후 예배당 벽에는 돌아오지 않은 사람의 이름이 늘었다. 가족이 이름을 새기고 날짜 옆에 작은 점을 찍기도 한다. 아직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다. 여행자는 그 앞에서 자신이 지나온 마을의 이름을 떠올리거나, 길에서 만난 사람 가운데 아는 이가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는다.

길의 풍습

고개를 지날 때 돌 하나를 얹는 사람도 있고, 강을 건너기 전에 자신의 이름을 물에 말하는 사람도 있다. 느릅나무에 천 조각을 묶고, 길 위의 쉼터에는 자신이 쓴 만큼 장작을 채워 둔다. 모두가 같은 풍습을 따르는 것은 아니지만, 여행을 오래 하다 보면 처음에는 낯설었던 행동의 뜻을 묻게 된다.

샘물에는 효험이 있다고들 한다. 돌아오는 날에는 강이 먼저 이름을 알아볼 것이라는 말도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다음 여행자에게 전한다. 그 말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까지 아는 이는 드물다.

06

길에서 마주치는 것들

길에서 마주치는 것들

첫 안개 뒤로 짐승들이 사나워졌다. 늑대와 들개가 길을 위협하고, 곰과 멧돼지를 피해 돌아가야 하는 일도 생겼다. 사냥꾼들은 짐승의 흔적을 살피며, 혼자 상대하기 어려운 큰 짐승이 나타나면 함께 나설 사람을 구한다. 지방마다 안개 속 짐승에 관한 소문이 돌고, 여행자는 그 이야기를 듣고 길을 바꾸거나 사냥터로 향한다.

사람이 길을 막아서는 일도 있다. 도적과 산적, 성문 수비에서 달아난 병사뿐 아니라 낫을 든 농부와 마주칠 수도 있다. 안개가 지나간 뒤 밭이나 오가던 길을 잃은 사람들이다. 사정을 듣고 흥정할 수 있을 때도 있지만, 모든 만남을 말로 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길에서 마주치는 것들

폐허에서는 사람 모양을 한 무언가를 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무너진 지붕 밑 어둠에서 일어서지만 사람은 아니라고 한다. 그런 것을 마주쳤다면 불빛을 가까이 두는 편이 좋다. 횃불을 들고 천천히 물러났더니 따라오지 않았다는 이들이 있다. 어디에서 왔는지,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동쪽 길은 안개와 함께 끊겼다. 블라이트모어가 바깥으로 난 길을 막고 사람을 들이지 않는다고 했다. 상인들이 내려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나 문마다 표시가 붙었다는 이야기가 돌았지만, 아직 그곳의 사정을 직접 확인한 사람을 만나기는 어렵다.

07

안개에서 나온 사람들

안개에서 나온 사람들

안개에서 나온 사람들의 이야기는 서로 다르다. 휘말리기 전의 일을 얼마나 기억하는지, 무엇을 두고 왔는지, 돌아가고 싶은 곳이 어디인지도 저마다 다르다. 낯선 여관에서 깨어났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이 살아온 날들을 알 수는 없다.

하이워터의 이름을 붙이고 다니는 사람이 모두 어부인 것은 아니며, 그레이힐을 고향으로 기억한다고 해서 같은 산길을 걸었던 것도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가족이 기다리는 곳이고, 누군가에게는 오래전에 떠나온 땅일 것이다. 이방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고향은 이곳 어느 지도에도 없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자신의 기억이다.

안개에서 나온 사람들

수도에 이름을 올리라는 조언은 이들에게 당장 향할 곳을 알려 준다. 그러나 그곳까지 가는 동안 누구를 만나고 어떤 일을 익힐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여관에서 들은 소문 때문에 길을 바꿀 수도 있고, 함께 걷던 사람과 마을에 더 머물 수도 있다. 낯설었던 지방에서 거듭 일손을 돕다 보면 다시 찾아갈 곳이 생기기도 한다.

첫 안개로부터 세 해째.

당신도 길을 나선다.

당신도 길을 나선다.

헤이즈바운드로